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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자 니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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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자 니야즈는 1889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태어나, 하미 군왕가에 대항하는 봉기에 참여했다. 이후 러시아로 망명하여 혁명 활동을 지원했으며, 1920년대에는 신장으로 돌아와 반란을 준비했다. 쿠물 반란 발발 후 마중잉과 협력했으나, 동맹이 파기된 후 성스차이와 동맹을 맺고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대통령을 맡았지만, 정권 붕괴 후 성스차이 정권에 참여했다. 1937년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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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자 니야즈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호자 니야즈가 쾨크바이라크 앞에 서 있음
호자 니야즈가 쾨크바이라크 앞에 서 있음
국적위구르족
직위동튀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
임기 시작1933년 11월 12일
임기 종료1934년 4월 16일
출생일1889년
출생지청나라 신장성 쿠물
사망일1941년 8월 21일
사망지중화민국 신장성 우루무치시
정당(정보 없음)
이름
일본어ホージャ・ニヤーズ

2. 초기 생애 및 봉기

호자 니야즈는 1889년 신장 하미의 산간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였던 1907년, 하미군왕가의 마크수드 샤 군왕에 대항한 농민 봉기(토르바크 폭동)에 참여했다가 실패 후 망명했다. 이후 투루판 등지를 거치며 종교 학교에서 공부하고 메카 순례를 통해 '하지' 칭호를 얻었다.

1912년 신장으로 돌아와 티무르 할파가 이끄는 하미 폭동에 참여하며 다시 저항 운동에 나섰다. 당시 신장성 성장 양 증신의 개입으로 티무르 할파가 잠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양 증신에게 살해당하자 호자 니야즈는 다시 망명해야 했다.

1916년에는 러시아 제국 국경 근처 자르켄트로 건너가 현지 위구르족 공동체와 교류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인 1921년에는 코민테른 산하의 혁명 조직인 Inqlawi Uyghur Ittipaqiuig("혁명 위구르 동맹") 설립에 참여하는 등, 망명 중에도 혁명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하미로 돌아와 마크수드 샤에게 사면받고 왕부 시위대 부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그의 초기 생애는 봉기와 망명의 연속이었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호자 니야즈는 1889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 하미의 작은 산간 마을 칠도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민 니야즈는 하미군왕가의 관원이었다.

18세가 되던 1907년, 청나라로부터 반자치 통치를 허용받은 하미의 세습 군왕 마크수드 샤에 대항하여 농민과 산악인들이 일으킨 봉기(토르바크 폭동)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봉기가 실패하자 투르판 지역으로 피신하여 치타이현, 모리 카자크 자치현, 보얼타러 몽골 자치주 등지를 거치며 사냥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투르판에서는 '아스타나'라는 종교 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공부하며, 훗날 위구르족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는 마크수트와 마흐무트 무히티 형제를 만났다. 이후 토크슨 현을 거쳐 메카성지순례를 떠났고, 이름에 '하지' 칭호를 얻었다.

1912년, 호자 니야즈는 신장으로 돌아와 티무르 할파(Timur Halpa, تۆمۈرنىياز|토뮈르니야즈uig)가 이끄는 하미 군왕가에 대항하는 반란(하미 폭동)에 참여하여 지도자의 고문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당시 신장성 총독이었던 양 증신은 처음에는 충돌을 중재하고 티무르 할파를 하미 지구의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1913년 9월 6일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티무르 할파를 기습 살해하자 호자 니야즈는 다시 망명해야 했다.

1916년, 그는 러시아 제국 국경 근처 제트수 주의 도시인 자르켄트에 도착했다. 자르켄트는 1881년 청나라 군대가 일리강 유역을 점령하자 이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일리 지역 위구르족들이 세운 도시였다. 이곳에서 그는 지역 위구르 지도자이자 부유한 상인인 발리야훈 율다셰프의 보호를 받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이후에는 소규모 위구르 자위대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러시아 내전이 중앙아시아 세미레치예(제트수) 지역까지 확산되자, 1921년에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혁명적 민족주의 조직인 ''Inqlawi Uyghur Ittipaqi|인클라위 위구르 이티파키uig''("혁명적 위구르 연합")의 창립자 중 한 명인 압둘라 로지바키예프를 만났다.

그 후 토크슨 현의 차구얼반 니야즈에게 의탁하여 추천을 받아 하미로 돌아왔다. 막수드 샤는 니야즈의 창술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사면하고 왕부 시위대 부대장으로 삼았다.

2. 2. 러시아 망명과 혁명 참여

1912년, 호자 니야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돌아와 티무르 할파가 이끄는 하미 군왕가에 대항하는 반란(하미 폭동)에 참여했다. 그는 반란 지도자의 고문으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13년 9월 6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성장이었던 양증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티무르 할파가 배신당하여 살해되자, 호자 니야즈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양증신은 이전에 분쟁을 중재하고 티무르 할파를 하미 지구의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한 바 있었다.

1916년, 그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국경 도시였던 자르켄트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1881년 청나라 군대가 일리강 유역을 점령한 후 러시아로 망명한 일리 지역 위구르족들이 세운 곳이었다. 자르켄트에서 그는 지역 위구르 지도자이자 부유한 상인이었던 발리야훈 율다셰프 밑에서 일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발발 이후 소규모 위구르 자위대 조직을 도왔다.

러시아 내전이 제트수(세미레치예) 지역으로 확산되자, 호자 니야즈는 1921년 위구르 혁명가 압둘라 로지바키예프를 만났다. 그는 로지바키예프와 함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혁명적 민족주의 조직인 Inqlawi Uyghur Ittipaqi|인클라위 위구르 이티파키ug("혁명적 위구르 연합")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3. 쿠물 반란과 혁명 지도자

1923년 신장으로 돌아온 호자 니야즈는 굴자와 우루무치 등지에서 지하 혁명 단체를 조직하며 새로운 반란을 준비했다. 1927년 부친의 장례를 위해 쿠물로 돌아갔으며, 1930년 쿠물 칸국의 통치자 샤 마스후트가 사망하자 칸국의 새로운 통치자에게 고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장 총독 진수런은 샤 마스후트 사망 후의 권력 공백을 이용해 쿠물 칸국을 강제로 폐지하고 한족 이주 정책 등을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는 위구르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931년 쿠물 반란이 발발하는 배경이 되었다. 호자 니야즈는 이 반란에서 주요 지도자로 부상하여 율바르스 칸 등과 협력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반란 초기 간쑤성후이족 군벌 마중잉과 연대하여 진수런 정권에 맞섰으며,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

반란은 신장 동부에서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나, 호자 니야즈와 마중잉의 동맹은 1933년 지머사르 현 전투 이후 무기 분배 문제 등으로 인해 깨졌다. 같은 해 쿠데타로 신장의 권력을 장악한 성스차이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마중잉과 대립하던 호자 니야즈와 새로운 동맹을 체결했다. 이후 호자 니야즈는 카슈가르에서 수립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1934년 1월 취임했으나, 마중잉 군대의 공격과 성스차이 군대의 압박으로 인해 공화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었다.[1][2] 이처럼 호자 니야즈는 쿠물 반란을 이끌고 독립 공화국의 지도자가 되는 등 혁명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복잡하게 얽힌 내부 세력 간의 갈등과 외부 강대국의 개입 속에서 완전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3. 1. 쿠물 칸국 고문 부임과 반란 발발

1923년, 호자 니야즈는 신장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굴자, 이후 우루무치에서 지하 혁명 단체를 조직하며 새로운 반란을 준비했다. 1927년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쿠물로 돌아갔다. 1930년 3월, 쿠물 칸국의 통치자 샤 마스후트가 사망하자, 호자 니야즈는 칸국의 새로운 통치자에게 고위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호자 니야즈


그러나 당시 신장 총독이었던 진수런은 샤 마스후트의 사망으로 인한 권력 공백을 이용하여 1928년부터 1933년까지 통치 기간 동안 쿠물 칸국을 폐지하고, 샤 마스후트의 아들 나지르가 칸국의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진수런은 또한 개토귀류 정책을 추진하여 호자 니야즈를 비롯한 위구르 지도자들을 견제하고, 회족 귀족들의 토지를 회수하며 청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하미 군왕의 특권을 폐지했다. 동시에 간쑤성 출신 한족 이민자들을 폐지된 칸국 영토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강행했다.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과 관료들의 부패는 위구르인과 한족 간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결국 1931년 2월, 이우현 주둔군의 압드 니야즈 미라프가 지방 세력과 연계하여 봉기하면서 쿠물 반란(하미 폭동)이 발발했다. 초기 봉기는 진압되었으나, 호자 니야즈와 구 왕부 관료들이 반란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진수런이 임명한 하미 경비 여단장 율바르스 칸 역시 비밀리에 반란 세력을 지원하다가 결국 호자 니야즈에게 합류했다. 호자 니야즈는 성 정부군을 상대로 매복 공격을 성공시키며 많은 무기를 확보했고, 위구르족, 카자흐족, 후이족 지도자들과 아혼(종교 지도자)에게 사절을 보내 지지를 얻으며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여 하미 지역 반대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성 정부군이 연이어 패배하자 진수런은 호자 니야즈에게 귀순을 권유했지만, 호자 니야즈는 하미현에서 성 정부군 철수, 쿠물 왕정 복고, 자신을 하미 방위 책임자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5] 진수런이 이를 거부하고 아커쑤 행정장 주루이츠(朱瑞墀)와 여단장 슝파요우(熊发有) 등을 동원해 재차 진압에 나섰으나, 성 정부군 내부의 부패와 지리적 이점 부족으로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1931년 6월, 호자 니야즈는 율바르스 칸과 회동한 후, 간쑤성후이족 군벌 마중잉과 접촉했다. 마중잉은 진수런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공동 작전에 참여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호자 니야즈는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1931년 가을, 몽골은 겨울옷 600벌, 펠트 텐트, 소총 120정을 제공했다(소총은 말과 교환하는 형식으로, 소총 1정당 말 2마리 비율).

1932년 8월, 마중잉은 마세밍(마세원)이 이끄는 부대를 신장으로 파견하여 호자 니야즈를 지원했다. 마세밍, 호자 니야즈, 율바르스 칸은 회담을 통해 연합 지휘부를 구성했으며, 마중잉이 총사령관, 호자 니야즈가 남로군 총지휘, 율바르스 칸이 선위사(宣慰使)를 맡았다. 마세밍은 호자 니야즈의 이름으로 진군하며 피찬현과 투르판 등지에서 현지 세력의 봉기를 유도하고 성 정부군을 격파하며 반란은 신장 동부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3. 2. 마중잉과의 협력과 갈등

1931년 쿠물 반란이 일어나자, 호자 니야즈는 율바르스 칸과 함께 간쑤성후이족 군벌 마중잉과 협력하여 신장 총독 진수런에 대항하기로 합의했다. 마중잉은 진수런 타도를 위해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기로 약속했다. 이 과정에서 호자 니야즈는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 1931년 가을 몽골은 그에게 소총 120정과 군복, 펠트 텐트 등을 제공했다. 이는 말과 소총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란은 신장 동부에서 시작되어 점차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33년 2월에는 위구르족과 후이족 연합군이 우루무치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33년 4월 성스차이가 쿠데타로 신장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변화했다.

호자 니야즈와 마중잉의 동맹 관계는 1933년 5월 지머사르 현 전투를 계기로 파기되었다. 이 전투에서 호자 니야즈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지머사르 현 수비대를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호자 니야즈는 요새의 무기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수비대의 자유로운 퇴각을 약속했다. 하지만 마중잉이 밤중에 요새에 나타나 무기고의 모든 무기(소총 12,000정, 기관총 6정, 탄약 50만 발)를 탈취하고 중국인 수비대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마중잉은 탈취한 무기를 호자 니야즈와 공유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호자 니야즈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 직후, 호자 니야즈는 우루무치 주재 소련 영사 가레긴 아프레소프와 접촉하여 성스차이와의 평화 회담을 시작했다. 1933년 6월 4일, 호자 니야즈는 성스차이와 동맹 협정을 체결하고 마중잉에 대항하기로 했다. 이 시점에 소련은 호자 니야즈에게 "탄약이 포함된 소총 약 2,000정, 수백 발의 폭탄, 기관총 3정"을 지원했다.[1] 아프레소프는 호자 니야즈에게 후이족(둥간족) 군대를 공격하도록 종용했으며, 이는 결국 민족 간 충돌 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성스차이와 동맹을 맺은 후, 호자 니야즈는 다반청을 거쳐 투르판 방면으로 진격했으나, 투크순에서 벌어진 투크순 전투에서 마중잉의 부하 마스밍이 이끄는 후이족 군대에게 패배했다.[2]

3. 3.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 수립과 좌절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국기


호자 니야즈는 투르판 전투에서 마스밍 장군 휘하의 툰간족(후이족)에게 패배한 후[2][8] 아크수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1933년 11월 12일 카슈가르에서는 무하마드 아민 부그라와 사비트 다몰라 등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당시 아크수에 머물고 있던 호자 니야즈를 부재중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사비트 다몰라는 호자 니야즈에게 사절을 보내 대통령 취임을 요청했고, 자신의 세력 확대를 원했던 호자 니야즈는 이를 수락했다. 그는 마잔창의 툰간 군대를 피하기 위해 톈산산맥 산길을 따라 아크수에서 카슈가르로 약 482.80km 가량 행군하여 1934년 1월 13일 도착,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대통령직에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취임 직후 호자 니야즈는 회의를 열어 외교부 장관 카스무 자나 아지를 파견하여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하고, 아프가니스탄, 튀르키예, 인도 등지에 사절을 보내 외부 승인을 얻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4년 2월 6일, 마중잉 군대의 선발대인 마푸위안, 마잔창과 카슈가르 행정장관 마샤오우가 연합하여 카슈가르를 공격하면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는 수립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붕괴되었다.

정부 붕괴 후 호자 니야즈는 우르구차트현으로, 총리였던 사비트 다몰라는 예청현으로, 아민 부그라는 호탄으로 각각 도주했다. 결과적으로 툰간 군대의 계속된 공세와 소련의 지원을 받은 성스차이 군대의 압박 속에서 동투르키스탄 제1공화국은 1934년 6월경 최종적으로 와해되었다.

4. 성스차이 정권 참여와 죽음

소련의 압력과 성스차이와의 협상 과정에서 호자 니야즈는 생명의 위협과 소련의 신용 상실을 우려하여[9] 동투르키스탄 정권을 해산하고 성스차이 정권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신장성 정부 부주석으로 임명되었으나[10], 이는 결국 감시와 숙청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결과로 귀결되었다. 자세한 과정과 그의 최후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4. 1. 신장성 정부 부주석 임명과 감시

1934년 초,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툰간족 군대의 공세와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 그리고 성스차이에 대한 소련의 지원으로 인해 패배 위기에 놓였다. 울루그차트현에 머물던 호자 니야즈에게 소련은 중소 국경의 이르케쉬탐에서 협상을 제안하며, 이전에 성스차이와 맺었던 협정을 준수하고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총리였던 사비트 다모올라 등을 체포할 것을 요구했다. 호자 니야즈는 "자신의 생명의 위험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의 신용을 잃을"[9] 것을 우려하여, 결국 동투르키스탄 정권을 해산하고 성스차이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34년 3월 2일, 예청현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사비트 다모올라는 호자 니야즈를 배신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5월, 호자 니야즈는 사비트를 체포하여 우루무치로 압송해 성 정부에 넘겼다. 7월에는 자신의 부대를 카슈가르에 남겨둔 채, 소련 군사 고문 말렌코프(마린코프)와 함께 우루무치로 이동했다. 1934년 10월 12일, 호자 니야즈는 신장성 정부의 부주석으로 공식 취임했다.[10] 그의 측근인 압두라흐만(아부두르어허만) 역시 성 재정청 부청장 자리에 임명되었다.

4. 2. 체포와 처형, 그리고 의혹

호자 니야즈는 1934년 성스차이에 의해 신장성 정부 부주석과 '종신 민정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군대와 격리된 채 우루무치에서 소련 요원의 감시를 받는 꼭두각시 신세였다.[3] 그는 스탈린을 직접 만나 민족자결권 원칙에 따라 신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요청을 했으나 거부당했다.[3]

1937년, 마흐무트 무히티 장군이 이끄는 제6 위구르 사단이 남부 신장에서 반란을 일으키자,[3] 성스차이는 8월부터 '음모 폭동 사건'을 빌미로 대규모 숙청을 시작했다. 호자 니야즈는 마흐무트 무히티(맘디)의 반란을 도우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1937년 10월 11일 천리푸 환영 연회에 참석한 후 체포되었다(일설에는 같은 해 11월 체포되었다고도 한다[3]).

모스크바의 승인 하에, 호자 니야즈와 그의 추종자 120여 명은 반혁명적인 '트로츠키주의자' 및 '일본 첩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3] 호자 니야즈는 이러한 혐의가 성스차이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부인했다.[3] 그는 사형 선고를 받자 "이 사형 선고는 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우루무치에 온 날 죽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설득하여 우루무치로 오게 한 소련 영사 가레긴 아프레소프를 믿었던 것을 후회하는 심정을 내비쳤다고 전해진다.[3]

호자 니야즈의 사망 시기와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린다.

  • 1938년에 처형되었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3]
  • 1941년 옥중에서 살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다른 설에 따르면, 1943년 여름까지 생존해 있다가 성스차이소련 세력을 축출하고 중국 국민당이 신장의 통제권을 회복한 후, 장제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때 감방에서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3]

참조

[1] 서적 Warlords and Muslims in Chinese Central Asia: a political history of Republican Sinkiang 1911–1949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2010-06-28
[2] 서적 Warlords and Muslims in Chinese Central Asia: a political history of Republican Sinkiang 1911–1949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2010-06-28
[3] 간행물 Soviet-Chinese collaboration in Eastern Turkestan: the case of the 1933 uprising
[4] 서적 Warlords and Muslims in Chinese Central Asia: A Political History of Republican Sinkiang 1911–1949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1986-10-09
[5] 서적 《中國經營西域史》
[6] 서적 《新疆風暴七十年》
[7] 서적 Warlords and Muslims in Chinese Central Asia: a political history of Republican Sinkiang 1911-1949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2010-06-28
[8] 서적 Warlords and Muslims in Chinese Central Asia: a political history of Republican Sinkiang 1911-1949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2010-06-28
[9] 서적 穆罕默德·伊敏,《新疆近代史》 迪化 1949
[10] 문서 古拉穆丁·帕赫塔,《中蘇在東突厥斯坦的合作:1933年起義》
[11] 문서 《哈密地區志》第三十二编人物傳
[12] 웹사이트 History of the Expedition in Asia, 1927-1935 : vol.3 http://dsr.nii.ac.jp[...]
[13] 서적 Community matters in Xinjiang, 1880-1949: towards a historical anthropology of the Uyghur https://books.google[...] BRILL 20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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